그날 — 아내의 유방암 진단을 받던 날
해외주재원 근무지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우리의 시간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 하루를 있는 그대로 적습니다.
2023년 8월, 해외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중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던 하루의 기록입니다.
약사인 아내가 자기 검사지를 스스로 읽어 내려가던 순간,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던 밤, 짐을 싸던 새벽을 담았습니다.
정보가 아니라 그날의 장면과 감정을 남기려 썼습니다.
- 그 전화 — 시작
-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 검사지를 읽어 내려가던 아내
- 가장 힘들었던 것 — 아이들에게 말하기
- 그날 밤, 실제로 우리를 붙든 것
- 지금 돌아보면
- 같은 자리에 있는 분께
그 전화 — 시작
퇴근 무렵이었습니다. 사무실 창밖으로 스콜이 지나간 뒤라 아스팔트에서 비린 물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고, 저는 노트북을 덮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낮에 통화할 때 아내는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도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날 아침 아내가 현관에서 "이따 결과 나오면 전화할게, 별거 아닐 거야"라고 웃으며 나가던 얼굴이 아직도 선합니다.
전화를 받자 아내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여보"라고 불렀습니다. 너무 평소 같아서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그리고 잠깐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침묵의 길이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두세 초쯤이었을 텐데, 그 안에서 저는 이미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래 산 부부는 목소리의 온도만으로도 압니다.
"암이래." 아내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뭐라고?"라고 되물었고, 그 순간 제 손에 들린 노트북이 얼마나 무거운지, 에어컨 실외기 도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런 것들이 갑자기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정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선명해졌습니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 제 그림자까지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갈게"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서 있었습니다. 집으로 가야 하나, 병원으로 가야 하나. 그 짧은 순간의 방향을 잃은 감각이, 앞으로 몇 년을 관통할 감각의 시작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저는 결국 가방도 제대로 못 챙긴 채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갔고, 시동을 걸어 놓고도 한참을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손이 떨려서였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그해 우리는 해외주재원 근무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세 아이를 데리고 나가 낯선 도시에 겨우 자리를 잡은 참이었습니다. 첫째는 한국에서 고3을 앞두고 있었고, 둘째는 중학교 3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아내는 약사였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일을 쉬고 있었지만, 약과 몸에 관해서는 우리 집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몇 주 전, 아내는 샤워를 하다가 가슴에서 작은 멍울을 만졌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괜찮을 거야,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약사인 아내가 그렇게 말할 때, 저는 그 말의 절반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말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는 사람은 오히려 더 두렵습니다. 아내는 그날부터 며칠간 유난히 말수가 줄었는데, 저는 낯선 나라 생활에 지쳐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현지 병원에서 초음파를 보고,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언어가 완전히 통하지 않는 진료실에서 아내는 의료 용어만은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검사 침대에 눕던 아내가 제 쪽을 한 번 돌아봤는데, 그 눈빛을 저는 아직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창밖만 봤습니다. 저는 라디오를 껐습니다. 무슨 음악이 나오든 그 순간엔 다 무례하게 들렸습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며칠, 우리는 그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학교 준비물을 챙기고, 평소처럼 지냈습니다. 아내는 그 며칠 동안 김치찌개를 끓이고, 막내 체육복을 다리고, 첫째와 화상통화로 수학 진도를 확인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며칠은 아무 일도 없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마지막 평범함을 지키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화가 왔습니다.
검사지를 읽어 내려가던 아내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앞에는 병원에서 받아 온 검사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현지어와 영어가 섞인 종이였습니다. 아내는 그걸 읽고 있었습니다. 약사의 눈으로, 한 줄 한 줄. 저는 그 옆에 앉았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종이를 읽을 수 없었으니까요. 형광펜도 없이, 아내는 손톱으로 종이 위 몇 군데를 꾹꾹 눌러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었습니다. "여기, 이 수용체가 양성이면 그래도 쓸 수 있는 약이 있어." 그러고는 또 한 줄을 짚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근데 여기 이 숫자는… 좀 크다." 저는 그 숫자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걸 말할 때 아내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떨렸다는 것만은 알았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그것이 3기 초반, 호르몬 수용체 양성이라는 걸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아내는 그 두 가지를 이미 스스로 짐작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소식을, 그 소식의 당사자가 가장 침착하게 해설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자기 병을 마치 약국 카운터 너머의 환자에게 설명하듯 저에게 설명했습니다. "호르몬 양성이면 항암 말고도 오래 먹는 약이 있어. 그건 좀 다행이야." 저는 그때 아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 침착함이 얼마나 큰 힘을 짜낸 것이었을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래? 그럼 다행이네"라고, 아무 근거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아내가 종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한국 가야 할 것 같아." 저는 "그래, 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한마디로 우리의 해외 생활은, 우리가 몇 년에 걸쳐 만들어 온 그 도시의 삶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아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 일은 어떡해." 저는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라고 답했습니다.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메일을 쓰다 말고, 저는 한국의 지인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차 때문에 한국은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그에게 저는 상황을 짧게 설명하고, 어느 병원이 좋을지, 어떻게 예약을 잡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몇 군데를 알려 주며 "일단 자료부터 다 챙겨서 들어와"라고 했습니다. 그 실용적인 한마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막막한 밤에 필요한 건 위로의 말보다 다음에 할 일을 알려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회사에 보낼 메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화면 앞에 앉아 커서만 깜빡이는 걸 한참 봤습니다.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결국 저는 "가족의 건강 문제로 급히 귀국해야 할 상황이 생겼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쓰고, 나머지는 다음 날로 미뤘습니다. 그 한 문장을 쓰는 데 삼십 분이 걸렸습니다. 몇 년을 쌓아 온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접는 일이 그렇게 짧고 그렇게 길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을 쓰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 뼘 가벼워졌습니다. 우선순위가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 — 아이들에게 말하기
그날 저녁,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셋 다 방에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어폰을 끼고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둘째는 게임을 하고 있었고, 막내는 거실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평범한 저녁 풍경을 저는 한참 바라봤습니다. 저 풍경을 깨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부엌에서 낮은 목소리로 상의했습니다. 다 말할지, 얼마나 말할지. 아내는 "숨기면 애들이 더 무서워해"라고 했습니다. 약사답게, 그리고 엄마답게 현실적이었습니다. "애들도 알 권리가 있어. 그리고 언젠가는 알게 돼." 저는 첫째 입시가 걱정됐습니다. 하필 고3인데. 아내는 "그래서 더 솔직해야 해. 어설프게 숨기면 걔가 상상으로 더 힘들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식탁에 불러 모았습니다. 막내가 "왜,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을 때, 저는 목이 잠겼습니다. 아내가 대신 말했습니다. "엄마가 아파. 가슴에 안 좋은 게 생겼어. 그래서 우리 한국 들어가서 치료할 거야." 첫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에 든 샤프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둘째는 "심각한 거야?"라고 물었고, 아내는 "치료하면 괜찮아질 거야, 요즘은 좋은 약도 많아"라고 답했습니다. 막내는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아내에게 다가와 팔을 감았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겨우 참았습니다.
둘째는 그날 밤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자기 전까지 게임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을 텐데, 그날은 방이 고요했습니다. 아내가 자기 전에 둘째 방을 들여다보니, 둘째는 자는 척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그냥 이불만 덮어 주고 나왔습니다. "지금은 말 걸면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엄마는 아이의 침묵도 읽습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밤을 견디고 있었고, 우리는 그걸 억지로 열어젖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첫째가 제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문틈으로 얼굴만 내밀고 "아빠, 엄마 진짜 괜찮은 거지?"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응, 아빠가 있잖아"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 거짓말 같은 대답이, 그날 제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첫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한참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복도에 서서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그날 밤, 실제로 우리를 붙든 것
아이들이 잠든 뒤, 우리는 거실에 앉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며칠 안에 아내가 먼저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여행 가방을 꺼냈고, 아내는 서랍에서 서류들을 챙겼습니다. 여권, 검사지 원본, 영상 자료를 담은 시디. 아내는 그 시디를 지퍼백에 넣어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이거 있어야 한국 병원에서 다시 안 찍어." 약사의 손이 거기서 빛을 발했습니다.
그날 밤 실제로 우리를 붙든 것은 거창한 각오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일들이었습니다. 한국의 큰 병원에 진료 예약을 넣는 것, 아는 선배에게 연락해 접수 방법을 묻는 것, 아이들 학교에 사정을 알리는 것.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할 일이 우리를 앞으로 밀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실제로 챙긴 것을 적어 둡니다. 훗날 같은 밤을 맞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새벽 두 시쯤, 아내가 짐을 싸다 말고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금 울었습니다. 소리 없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옆에 앉아 아내의 등에 손을 얹었습니다. 등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눈물을 닦고 "자, 이거 마저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짐을 쌌습니다. 그 새벽, 거실 불빛 아래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병을 '함께' 마주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내는 선항암을 받고, 수술을 하고, 방사선을 마치고, 지금은 매일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 사이 저는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돌봄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날의 저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면, 저는 두 가지를 말해 주고 싶습니다.
첫째, 그렇게 다 알아야 한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단받던 날 저는 검사지의 숫자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보호자의 일은 병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검사지를 읽지 못했지만, 아내의 등에 손을 얹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거면 충분한 날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날 이후 저는 조금씩 병에 대해 배웠고, 결국 필요한 만큼은 알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다 알 필요는 없었습니다.
둘째,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한 것은 옳았다고. 그때는 아이들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단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아이들은 자기들이 상황을 알고 있어서 덜 무서웠다고 말했습니다. 숨기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 고립이었을 겁니다. 그날 밤 불이 오래 꺼지지 않던 첫째 방은, 사실 혼자 감당하는 방이 아니라 함께 감당하기 시작한 방이었습니다.
그날의 저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세상이 무너진 게 아니라, 우리가 살던 세상이 다른 모양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서도 우리는 밥을 먹었고, 웃기도 했고, 계속 살았습니다. 진단은 끝이 아니라, 다른 삶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또 하나, 그날 제가 아내에게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라고 회사 걱정을 잘라 낸 것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번 흔들렸고 무너지기도 했지만, 그날 밤 정한 우선순위만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인생에는 계산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정이 이후 몇 년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는 분께
혹시 오늘 그 전화를 받으셨다면, 혹은 그 검사지를 손에 들고 계시다면, 저는 무슨 말도 쉽게 건네기 어렵습니다. 그날의 무게를 저도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다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단받는 날에는 앞으로의 몇 년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집니다. 항암은 어떻게 견디나, 수술은 무섭지 않나, 아이들은 어떡하나. 그 모든 걸 그날 밤에 다 풀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한 가지—예약을 넣거나, 자료를 챙기거나, 잠깐 함께 울거나—만 하면 됩니다. 그다음 날은 그다음 날이 옵니다. 저는 그 사실 하나에 몇 번이나 기댔습니다.
그리고 만약 곁에서 지키는 보호자라면, 병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곁일 때가 많습니다. 검사지의 숫자는 의사가 읽어 줍니다. 그 사람의 손을 잡는 일은, 오직 당신만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날의 우리처럼 짐을 싸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짐 속에 검사 자료를 꼭 챙기시고, 완벽하게 챙기려 애쓰지는 마시라고. 그리고 새벽에 무너지더라도, 그건 약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기억하시라고. 우리는 그 새벽을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도 지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 오늘의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