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44일, 아빠와 아들, 산티아고
"함께 걷는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투병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여기 모인다. 병원 밖에서도 가족은 살아간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어딘가로 걷는다. 그 걸음들을 따로 묶어두고 싶었다. 첫 글은 2025년 여름, 막내아들과 함께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아내의 회복을 빌며 걸었다. 7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 44일이었다. 카미노 프랑세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있었던 일을 여기 적는다.
떠나기 전
아내는 유방암 3기 초반이었다. 선항암을 맞고 2024년 4월에 전절제 수술을 받았다. 방사선을 스무 번 쬐었다. 여행을 떠나던 무렵에는 아로마신을 매일 먹고 한 달에 한 번 루프린 주사를 맞고 있었다. 치료는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내를 돌보는 일이 하루의 전부가 되었다. 병원 예약을 잡고 약을 챙기고 식사를 준비했다. 그 하루가 어느 날부터 버겁게 느껴졌다.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출발 전 몇 주는 짐을 꾸리는 데 썼다. 배낭 무게를 저울에 재고 다시 덜어냈다. 신발을 새로 사서 집 안에서 며칠을 신어보았다. 지도를 펴놓고 하루치 거리를 계산했다. 그 계산이 맞을지는 걸어봐야 알 일이었다.
막내아들에게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아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말은 짧았다. 그날 밤 아들은 방에서 자기 배낭을 혼자 다시 쌌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뺐는지는 묻지 않았다. 셋 중 나머지 두 아이는 각자의 자리에 남았다. 집을 나서는 날 아침, 아내는 현관까지 나와 배웅했다.
7월 11일, 한국을 떠났다. 공항 에스컬레이터를 아들이 먼저 내려갔다. 배낭이 아들의 등보다 컸다. 나는 그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마드리드를 거쳐 생장피에드포르로 가는 데 사흘이 걸렸다. 그동안은 걷지 않았다. 비행기와 버스에 몸을 실었을 뿐이다. 생장에 도착한 밤, 창밖으로 산의 능선이 검게 서 있었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여권을 처음 받았다. 그 안에 도장이 찍힐 빈칸이 나란히 있었다. 첫 도장은 그 사무소에서 찍었다.
피레네
7월 14일, 4일째 되던 날 생장을 떠났다. 첫 걸음이 곧 이 길에서 가장 힘든 걸음이었다. 이른 아침이었고 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마을을 벗어나자 곧바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초록 구릉이 먼저 나왔다. 목장의 울타리가 이어지고 양들이 흩어져 있었다. 방울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 구릉은 오래가지 않았다.
길은 곧 돌길로 바뀌었다. 돌이 크고 고르지 않았다. 발목이 매번 각도를 다시 잡아야 했다. 숲이 시작되자 경사가 급해졌다. 나무 그늘 아래로 땅이 젖어 있었다. 신발 바닥이 자꾸 미끄러졌다. 오전에 비가 잠깐 뿌렸다. 판초를 꺼내 입었다. 빗물이 판초 아래로 스며 바짓단을 적셨다.
숨이 짧아졌다. 몇 걸음 걷고 멈추고 다시 걸었다. 배낭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끈을 고쳐 매도 잠시뿐이었다. 다리는 다리대로 무거워졌고 심장은 심장대로 빨라졌다. 고도가 오를수록 나무가 낮아졌다. 낮아진 나무 사이로 능선이 보였다 사라졌다. 오리송의 산장을 지날 때 잠시 앉아 물을 마셨다. 다시 일어서는 데 힘이 들었다. 빵과 치즈로 점심을 먹었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어깨가 그제야 펴졌다.
정오를 지나자 바람이 거세졌다. 능선 위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온이 떨어졌다. 아침의 더위가 거짓말 같았다. 재킷을 꺼내 입었다.
아들이 앞서 걸었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몇 번은 아들이 앞에서 멈춰 서서 나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상 부근에서 안개가 몰려와 시야를 가렸다. 표지판의 숫자만 보고 걸었다. 국경을 알리는 낮은 돌을 지났다. 그 돌 말고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것이 없었다.
저녁에 신발을 벗으니 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첫날이었다. 아들의 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발을 들여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땄다. 다음 날을 위한 일이었다. 그날 밤 다리에 쥐가 났다. 잠이 몇 번 끊겼다.
새벽, 언덕의 십자가
7월 25일, 부르고스로 향하던 날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을 때 걷기 시작했다. 알베르게를 나설 때 다른 순례자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문을 조심히 닫았다.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만 발 앞을 비췄다. 발끝만 보고 걸었다. 길가의 자갈이 랜턴 불빛에 반짝이다 지나갔다. 발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가 끊겼다.
아타푸에르카를 지났다. 오래전 이곳에서 고대인의 화석이 나왔다고 했다. 호모 안테세소르. 이름만 들었을 뿐 그 유적지는 어둠 속에 조용히 있었다. 발굴지를 알리는 낮은 팻말이 랜턴 불빛에 스쳤다.
언덕이 시작되었다. 알토 데 아타푸에르카였다. 안개가 짙었다. 몇 걸음 앞도 흐리게 보였다. 풀이 젖어 신발 끝을 적셨다. 공기가 찼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안개에 섞여 사라졌다. 오르막은 짧았지만 안개 속이라 끝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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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 위에 긴 나무 십자가가 서 있었다. 십자가는 안개 속에서 회색으로 보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뿐이었다. 바람이 안개를 조금씩 흔들었다.
아들이 그 아래 섰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해가 안개 뒤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빛이 안개를 뚫지 못하고 그 안에서 번지기만 했다. 아들은 그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셔터를 눌렀다. 한참을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가 다시 걸었다.
이 여행에서 가장 오래 들여다보는 사진이 그날 나왔다.
부르고스
그날 부르고스에 닿았다. 이틀을 쉬었다. 대성당 안에 들어갔다. 중세의 그림과 유물들이 어두운 벽을 채우고 있었다. 밖은 뜨거웠고 안은 서늘했다. 돌기둥 사이로 발소리가 울렸다. 천장이 높아 소리가 오래 남았다.
아들과 나는 각자 걸었다. 나는 이쪽 회랑을, 아들은 저쪽 회랑을 걸었다. 말을 걸지 않았다. 한참 뒤 입구에서 다시 만났다. 만났을 때도 별말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했다. 세면대에서 손빨래를 하고 젖은 양말을 창가에 널었다. 발바닥의 물집을 소독하고 새 밴드를 붙였다. 이틀째 되던 날 물집이 조금 가라앉았다. 시내 식당에서 처음으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스프와 고기, 빵이 한 상이었다. 값이 쌌고 양이 많았다.
이틀을 쉬는 동안 배낭을 다시 정리했다. 필요 없는 물건을 골라냈다. 무게가 조금 줄었다. 신발 깔창도 새것으로 바꿨다. 걸을 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메세타, 걷는 날들
부르고스를 지나자 평원이 시작되었다. 메세타였다. 길은 곧게 뻗어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굽은 곳이 거의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앞의 풍경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밀밭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밀은 이미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아 있었다. 흙빛이 마른 밀짚과 같은 색이었다. 그 위로 해가 곧게 내리쬐었다. 그늘이 없는 구간이 몇 시간씩 이어졌다. 정오 무렵에는 기온이 높아 그림자 없는 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다. 물병의 물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이른 새벽에 걷기 시작하는 날이 늘었다. 해가 뜨기 전에 몇 킬로미터를 벌어두면 낮의 열기를 피할 수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 걷기를 멈추고 그늘에서 낮잠을 잤다. 시에스타였다.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마을 상점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이정표가 남은 거리를 숫자로 알렸다. 455킬로미터. 그 숫자를 보고 걸음 수를 헤아리듯 걸었다. 걸음마다 발바닥이 땅을 밀었다. 그 반복이 하루를 만들었다.
도보 스물아홉 날, 휴식 여드레, 이동 엿새. 하루하루가 그 셋 중 하나였다. 아침에 배낭을 메고 저녁에 배낭을 내렸다. 그사이에 걷고 먹고 씻고 잤다. 다른 일은 없었다. 저녁이면 마을 알베르게의 이층 침대에 몸을 눕혔다. 옆 침대의 낯선 순례자가 코를 골았다. 그래도 잠은 왔다.
발톱 하나가 검게 죽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걷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그저 신발을 벗을 때마다 눈에 띄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종아리에 파스를 붙이고 잤다.
레온
8월 3일, 레온에서 하루를 쉬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받아 바닥에 색을 뿌렸다. 붉고 푸른 빛이 돌바닥 위에 얼룩처럼 놓여 있었다. 창의 높이가 까마득해 목을 젖혀야 끝이 보였다.
나는 그 아래를 걸었다. 아들이 그 뒷모습을 찍었다. 사진 속에서 걷는 사람이 이때 처음으로 나였다. 그전까지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늘 아들이었다.
걷지 않는 날에도 다리는 아팠다. 근육이 회복을 요구했다. 계단을 오를 때 무릎이 뻐근했다. 우리는 빨래를 하고 발을 씻고 일찍 잤다.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과 물 한 병을 시켰다. 아들은 물만 마셨다.
레온까지 걸어온 거리를 헤아려보았다. 절반을 넘어 있었다. 남은 날을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밤에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사진을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잘 지낸다는 말, 몸조심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고 불을 껐다. 창밖으로 대성당의 조명이 늦도록 켜져 있었다.
철 십자가, 돌 하나
8월 6일, 레온을 지나 산속 높은 곳에 이르렀다. 크루스 데 페로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 오르막을 올랐다. 나무가 드문드문했고 바람이 트여 있었다. 산 아래 마을들이 점점 작아지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무더기가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그 위로 긴 기둥이 서 있고 기둥 끝에 철 십자가가 있었다. 돌무더기 아래로는 순례자들이 놓고 간 물건들이 섞여 있었다. 사진, 리본, 낡은 신발 한 짝도 있었다.
순례자들은 저마다 집에서 가져온 돌 하나를 그 아래 내려놓는다고 했다. 짐을 벗어놓듯, 혹은 마음을 벗어놓듯.
아들이 배낭에서 돌 하나를 꺼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배낭 안쪽 주머니에 넣어 여기까지 지고 온 돌이었다. 아들은 그 돌에 글씨를 적었다. 유성펜이었다. 엄마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몇 마디를 더 적었다. 어떤 날은 마음이 가라앉고 어떤 날은 아무 이유 없이 흔들린다고, 그 흔들림도 이제 여기 놓고 가겠다는 말이었다.
아들이 돌을 돌무더기 위에 얹었다. 손을 떼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배낭을 고쳐 메고 걸었다. 내려가는 길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착
8월 15일, 서른여섯째 날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닿았다. 대성당의 첨탑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처음엔 점처럼 작았다가 걸을수록 커졌다. 마지막 몇 킬로미터는 도심의 아스팔트였다. 흙길에 익숙해진 발바닥에 그 단단함이 낯설었다.
아치 아래 아들을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배낭을 멘 채였다. 신발은 다 해져 있었다. 밑창 옆으로 실밥이 터진 곳도 있었다. 옷은 볕에 바래 색이 흐릿해져 있었다.
737킬로미터를 걸었다. 이정표로는 780킬로미터였다. 숫자는 걸음의 크기를 말해주지 않는다. 발바닥의 굳은살과 무릎의 뻐근함이 그것을 말해줄 뿐이다. 숫자는 그저 숫자였다.
우리는 대성당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광장을 오가는 다른 순례자들이 서로 껴안고 사진을 찍었다. 백파이프 소리가 광장 한쪽에서 들렸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완주 증서를 받았다. 이름을 라틴어로 적어주었다. 종이 한 장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배낭에 조심히 넣었다. 길은 아직 남아 있었다.
땅끝
산티아고에서 하루를 더 갔다. 피니스테레, 유럽인들이 오래전 세상의 끝이라 믿었던 곳이다. 등대가 서 있고 그 옆에 'km 0.000'이라 새긴 표석이 있었다. 대서양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와서야 바닷바람의 소금기가 느껴졌다.
아들이 바위 끝에 섰다. 바다를 마주 보고 섰다. 오래 서 있었다. 파도가 아래 바위에 부딪혀 흰 거품을 만들고 다시 물러갔다. 갈매기 몇 마리가 등대 위를 낮게 돌았다.
아들이 빌었다.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짧은 말이었다. 바람이 그 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옆에 서서 같은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은 곧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해가 기울며 바다 위로 붉은 빛이 길게 깔렸다.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더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감자와 문어, 빵과 포도주였다. 물을 몇 잔이고 마셨다. 배가 찼다. 오래 걸은 다리가 의자 아래서 무겁게 늘어졌다. 밥을 먹는 일이, 그날은 유독 정직하게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와 신발을 벗었다. 이제 더 걷지 않아도 되는 발이었다.
돌아오는 길
땅끝에서 다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버스를 탔다. 포르투로 갔다. 포르투에서 마드리드로,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로 갔다. 세고비아에서 파리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순례길만 걸은 거리가 737킬로미터였다. 도시들을 오가며 걸은 걸음까지 더하면 이 여정 전체는 천 킬로미터를 넘겼다. 비행기와 기차 안에서는 걷지 않았다. 그래도 발은 여전히 뻐근했다. 세고비아의 수도교 아래를 걸을 때도, 파리의 넓은 대로를 걸을 때도 몸은 순례길의 걸음걸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8월 23일, 한국에 돌아왔다. 44일 만이었다. 짐을 풀며 배낭 밑바닥에서 마른 흙이 조금 떨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 44일은 그저 걷기만 한 날들이었다. 대단한 결심도 깨달음도 없었다. 발이 아팠고 배가 고팠고 밤이 되면 잤다. 아들과 나눈 말은 많지 않았다. 피레네의 오르막에서도, 아타푸에르카의 안개 속에서도, 철 십자가 아래서도 말은 짧았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걸었고 함께 도착했다.
아내는 그동안 한국에서 치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길이 그 병을 낫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길을 걸은 사람이 돌아가 다시 아내 곁을 지켰다. "함께 걷는 길"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였다. 걷는 일과 곁을 지키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이 글은 개인의 경험과 기록을 담은 것으로, 의학적·재정적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과 관련된 결정은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작성: 유방암 환자의 보호자(비의료인) · 정정 및 편집 방침